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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 문제는 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 <미국이 소련-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유도 했는가?>

by 찐럭키가이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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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 문제는 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 <미국이 소련-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유도 했는가?>

과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교통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세력들이 성장하며 영향력을 내려던 지역이다.19세기 이후 해양진출을 위해서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은 인도양으로 나가는 통로인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이에 맞서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역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무력간섭을 자주 하였다. 이런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19세기 무렵, 3차에 걸쳐서 계속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 1839 ~ 1842, 2: 1878 ~ 1880, 3: 1919 )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대내적으론 수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세력들이 거쳐가면서 이 지역은 철저하게 각 부족별로 움직이고 있을 뿐, 바라크자이 왕조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강 통일국가로서의 아프가니스탄을 이룩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란 인식이 희박하였고 애초부터 이 지역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국가란 인식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국토의 80%가 돌무더기 뿐인 가파른 산악의 연속이고,나머지는 사막과 황무지가 대부분.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은 동네인데,전쟁이라니 아프카니스탄 문제는 왜?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미국이 소련-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유도 했는가?등을 포스팅 한다.

 

1.아프카니스탄 문제는 왜?

전후 아프가니스탄 왕정

전후 아프가니스탄 왕정은 1960년대에 공식적으로 비동맹 노선을 표방했지만, 서방식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부동항을 얻기 위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던 이웃 소련과도 적절한 친교를 맺었다.

 

이러한 실리적인 정책으로 6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로운 근대화를 차근차근 이루어내고 있었지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소련과 군사적으로 교류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군에서 소련으로 연수보낸 군인들이 돌아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반면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아프가니스탄 향촌에서는 서구화와 소비에트화에 모두 반발하면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세력을 더욱 확장하고 있었다.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 왕정폐지,공화국을 선언

1973, 자히르 샤국왕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으나,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왕이 해외 순방을 하는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정권을 장악한 다우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우드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 정책을 실시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면서 국가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된다.

 

1978,좌익계 군인들의 쿠데타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공산정권 vs 반공 게릴라 무자헤딘 내전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우드 칸 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다우드 칸이 쿠데타군에게 살해되면서,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 등이 이끌던 아프간 내 최대 좌익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이에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반발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군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 공산 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미 소련은 이 이슬람 세력이 자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수많은 KGB 요원을 아프가니스탄에 잠입시켰다.

 

아프가니스탄은 집권 친소 세력과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로 나눠져 난장판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소 세력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소 세력뿐만 아니라 아프간 거주 소련인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인도적 목적으로 파견되어 있던 원조단까지도 인질로 잡고 살해함으로써 소련을 자극시킨다.

 

19793월의 헤라트 반란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명령을 받고 반정부시위 진압에 투입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육군 17사단 병력들이 이스마일 칸 대위의 선동으로 오히려 반정부군 세력에 가세해버린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소련 군사고문 1명과 민간인 소련인 2명을 학살하고 시체를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소련의 특수작전...아민 대통령을 제거

더구나 집권한 공산주의 세력들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아민이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친소 성향이었던 아민 대통령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CIA에게 포섭되었다고 아민 반대파가 흘린 거짓 정보가 KGB를 움직이게 하여 결과적으로 소련은 아민을 불신하여,197912월 소련 특수 부대가 아민을 암살한다.

 

아민은 소련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는데 그 예로 아민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적으로 동원하고 집에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한술 더 떠서 아프간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에게도 붉은색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칠하도록 권고를 하기까지 했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친소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아민을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세우는데 아민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14명 전사)으로 성공적으로 보이긴 했으나 아민이 아프가니스탄을 개판으로 운영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반 소련파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KGB

아민을 제거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된 바브라크 카르말을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아프가니스탄에 원래 있던 친소정권을 갈아엎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은 소련의 침공을 기회로 여기고 카르말 정권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한 뒤 반란을 일으킨다.

 

소련의 참전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련인들은 아프간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달라."며 소련군에게 요청하고, 소련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은 친소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전면개입하게 된다.

 

19791224,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소련군 제40군은 아프간 접경 테르메즈 인근의 아무다르야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고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1224일부터 1989215일까지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 전쟁은 막대한 전비소모로 인해 소련 해체에도 영향을 주었기에 소련이라는 ''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에 가두었다는 의미에서 '곰덫(The Bear Trap)'이라고도 표현된다.

 

미국의 사이클론 작전

소련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방은 1979-1989년 까지 소련에 저항할 수 있는 반군을 육성하는데 흔히 알고 있는 알카에다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알카에다의 근간이 되는 (Maktab al-Khidamat,MAK)가 처음에는 서방의 지원을 받아 반군을 훈련하고 지원하는 단체였으며 CIA 작전중에 가장 오래 지속되었으며 지원비용은 60~120억 달러에 달해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작전으로 불린다.

 

미국CIA, 영국 MI6,SAS, 이스라엘 모사드,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서방을 포함한 사우디, 이집트, 중국 등이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다.

 

이 작전으로 10만명 규모의 무자헤딘을 육성하였고 작전 초기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발각될까 우려하여 이집트, 이스라엘을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에나 쓰이던 구식 무기나 중고 소련제 무기를 지원하였으나 1985년 전쟁 중반부터 적극적인 소련 견제를 위해 스팅어미사일을 포함한 서방제 무기를 지원하게 된다.

 

모병은 아프가니스탄 소수민족을 포함 파키스탄, 사우디,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미 국무부 와 CIA는 민간인으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접경지역을 자주 방문하여 훈련을 지도하는 등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92년도까지 지원이 이루어졌고, 미국이 걸프전에서 노획한 무기들을 제공받았다고 하며 중국은 이 작전에 참여하는 댓가로 미국 무기 수출금지조치가 해제 되었고, 신장 위구르 지역의 주권을 보장받았다는 설이 있다.

 

알카에다의 반미

전쟁이 끝난후 알카에다,무자헤딘에서 활동하던 아랍인들은 본국으로 귀국 후 환영받지 못했으며, 정부의 감시와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아프가니스탄에 머물게 되었다.

 

오사마 빈라덴은 걸프전쟁 때 사우디를 돕기 위해 무자헤딘을 제공하려 했으나 사우디의 파드왕은 거절하고,대신 미군, 연합군이 사우디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허용했다.

 

빈라덴은 크게 실망하여 사우디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사우디에서 추방당해 수단으로 가게 된다.

 

미국을 위해 싸웠던 자신들이 하루아침에 토사구팽 당한 것에 실망한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반미노선을 하게 되고 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하게 된다.

2.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

전쟁 전개과정

무자헤딘은 소련이 세운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공격하며 급기야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간 주둔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소련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들을 냈다.

 

무자헤딘을 이끌던 7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는데 마수드의 활약지가 소련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소 카르말 정권과 소련군을 공격했다.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은 마수드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1982년에 행해진 5(12천여 명 동원), 6차 공세 모두 합쳐 소련 측에서 3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군 1천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며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 병사들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19847차 공세에서는 소련-공산 아프간군 21천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천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아프간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소련 측은 1986년에 공세를 결국 중단,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문제는 판지시르 계곡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는데 1985년 후반기에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3km 떨어진 자와를(Zhawar)에서도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놓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카르말 아프간 정부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2천여 명의 소련-공산 아프간 동맹군(이 중 22백여 명이 소련군)이 다시 재차 공격을 가해서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버렸다.

 

1987년에는 파키스탄 남부 국경지역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나지불라 아프간 정부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 군에 대패하여 17백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1987-1988년 사이 겨울에는 소련군 2만 명, 아프간 공산군 8천 명이 파키타 주(Pakit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만 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서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서 아프간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소련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상대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소련이다 보니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소련군은 15천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20배에 달하는 30만 명이었으며 모든 전투에서 소련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광활한 아프가니스탄의 각 주요도로와 거점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소련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기기 불가능한 전쟁이었던 셈이었다.

 

현지에 나간 소련군 장군들도 모스크바에 전차와 전투기 중심이 아닌 2백만 명이 넘는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보급부대를 통하여 요충지나 도로 같은 점과 선 뿐만 아니라 면인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모스크바 군 장성들도 이에 동의하고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안을 보고 했으나 소련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자헤딘과 소련군, 아프간 정부군 간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사상자가 만단위로 올라가자 소련군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온갖 대응방법을 내놓고 그 중 하나가 산악지대인 아프간의 특성에 대처하기 위해 육군 항공대 소속의 Mi-24 공격헬기 부대를 투입해 CAS를 하는 전법으로 성과를 올렸다.

 

유명한 특수부대 스페츠나츠도 투입되어 게릴라전에 게릴라전으로 반격을 펼쳐보였고 회전익기 뿐만 아니라 소련 해군 항공대와 공군을 동원해 공습과 폭격, 미사일 공격을 했으며 독가스 등 화학무기를 살포하고 무자비한 대 게릴라 작전을 펼쳤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아프간 국민들의 반감만 올라갔다.

 

쿠란에 폭탄을 설치해서 이슬람 교도들이 쿠란을 펼치는 순간 터지도록 만드는가 하면, 위장폭탄으로 무자헤딘의 집이나 기지 속에서 터지도록 만들기도 하는 등 꽤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승리하지는 못했다.

 

각국의 개입과 지원

이 전쟁은 세계 각국이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버금가는 대규모 국제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었고 당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터키, 서독 등 서방세계 국가들은 소련군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소총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정보기관 요원들도 직접 파견해서 정보 지원도 하였는데 당시 CIA가 무자헤딘에 제공한 무기의 총 가치는 약 30억 달러였으며 곡물, 기술 수출 금지 등 소련에 경제 재제를 부과하고 전략무기제한협정의 미국 의회 비준을 연기하는 등 보복 조치를 행하기도 했으며, UN에서 각종 대소·대아프간 결의안을 채택하며 소련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한편 냉전 동안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두고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도 미국과 수교하고 한참 개혁개방에 나서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과 손잡고 무자헤딘을 지원하였는데 소련제 무기를 무단복제해서 사방에 뿌리는게 특기던 중국인지라 이때도 역시 AK-47소총부터 온갖 무기를 생산했고, CIA가 이 중국산 무기를 사들여서 파키스탄을 경유해서 무자헤딘에 넘겼다.

 

중국과 미국 양쪽과 동맹관계였던 파키스탄은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배후 근거지 역할을 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이란,인도네시아, 이집트 같은 이슬람권 국가들도 무자헤딘을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지지하거나 자금 및 무기 등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원을 했던 곳이 이집트였는데, 그 당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그의 뒤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 이스라엘과 맺은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으로 인해 중동 아랍국가들의 지역기구인 아랍연맹에서도 회원국 자격을 잃고 추방당하는 등 당시 이슬람 아랍권 국가들 사이에서 반 이스라엘 노선을 천명하다가,시오니즘 세력들과 손잡은 변절자,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게 저항하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하여 이슬람 아랍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이슬람권에서의 외교적 고립을 극복하려고 했었다.

 

반면에 북한, 쿠바는 소련에 대해 극한 유감과 실망을 나타내었으며,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도 마찬가지였고,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등 일부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대통령을 사살하고 괴뢰정권을 세우며 점령군 행세를 보이자 아프가니스탄을 무단 침공한 소련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유감을 표시해 이 전쟁에서 소련을 지원하였던 나라들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위성국 불가리아, 동독, 헝가리, 소련과 친했던 인도(무자헤딘을 지원하였던 파키스탄과 전통적으로 앙숙관계)가 소련을 지지했으나,그 외 이슬람권에서는 드물게 소련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남예멘, 팔레스타인은 소련을 지지하기는 했다.

 

이래저래 제대로 되는 건 없이 피해만 늘어나는 상황... 싸울래야 싸울 적도 잘 안 보이는데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오거나 터지면서 사상자만 늘어가는 애매한 나날이 계속되다가, 외교적으로도 욕을 먹기 시작하고 소련 내에서도 예상 외로 길어진 장기전에 염증을 느껴 철수하자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은 주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을 가정해 훈련해 왔기 때문에 평원에서 기동전을 펼치거나 제파식 전술로 밀어붙이는 데 더 익숙했고, 산악전 및 게릴라전 대비는 전무하다시피 해 평지라고는 산간지대에 끼어 있는 분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시피 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영향...소련의 붕괴

이 전쟁이 곧바로 소련 붕괴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SDI 추진에 따른 군비경쟁, 1986년 유가 붕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와 함께 10년간 지속된 아프간 전쟁은 소련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소련 경제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원인으로 항상 거론된다.

 

또한 약 10년 가량 지루하게 이어지던 전쟁은 당시 소련 젊은이들에게 반전주의와 염세적 허무주의를 널리 퍼트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허무함에 빠진 일부 군인들은 술과 마약, 매춘에 탐닉하게 되었고, 이들은 귀국 후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련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아프간 참전군인들의 상당수는 술, 마약, 매춘에 쩔어 살았고 그 중 일부가 에이즈에 감염되기도 했고 게다가 마약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크로코딜에 중독된 참전자들이 꽤 있어 이들을 통해서 소련 전역에 마약이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사병 참전자는 거진 대부분 하층민이 되었고 심지어는 장교 참전자 역시 위관급 정도는 사병 참전자와 별다를 게 없었다.

 

거의 10년 간의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은 62만 대군인데 이들 중 8-10만 정도가 평상시 유지 숫자였고 전쟁으로 인한 소련 측의 전사자는 15천여 명, 부상자 54천여 명이며,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숫자도 수백여 명에 달했으며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귀환한 소련군 장병들 중 포탄 쇼크나 정신 이상 증세, 부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40만이나 되었다.

 

일부에서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형편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소련이 패퇴한 10여년 후 같은 곳에 들어온 미군 및 ISAF(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국제안보지원군)가 온갖 첨단무기로 도배하고서도 무자헤딘보다 훨씬 조직력이 떨어지고 고립된 탈레반 반군을 진압하지 못했음을 상기하면,소련군은 적어도 전술적으로 미군만큼은 전과를 올린 편이다.

 

특히, 소련군은 미국으로부터 온갖 무기를 공급받으며, CIA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를 제공받던 무자헤딘과 싸우면서도 아프간 정부군을 모양새 있게 조직해서 연합작전을 효율적으로 펼칠 정도였으니,자신이 조직한 아프간 정부군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미군보다는 보조병 운용도 더 잘한 셈이며 아프간에서 소련군은 잘 싸웠다.

 

그러나,소련군 장성 출신 인사들은 아프간 전쟁 전까지 2차대전에서의 승리라는 막대한 정치적 명분으로 소련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력 중 하나였는데 아프간 전쟁 역시 뒷 배경에는 소련군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었고, 이런 소련군에게 있어 아프간 전쟁의 패배는 단순히 군 차원에서 전략적 실패가 아닌 정치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실패였다.

 

게다가 아프간 전쟁을 치루면서 발생한 대규모 부상, 사상자와 소련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소련 국민들이 소련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남오세티야 전쟁, 시리아 내전의 참전 군인들은 지금도 모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에 비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 용사들은 대부분 참전 사실을 숨기거나 자랑하지 못할 정도로 대우를 못 받고 있다.

 

특히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아닌 소련 내 발트 3국이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의 자치 공화국들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으면서, 해당 자치 공화국 국민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침략 전쟁에 개입한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고, 이는 조국의 수호자라는 소련군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비단 정치적인 차원 뿐만이 아니라 소련군은 1989년까지 지속된 아프간 전쟁으로 군사적 역량을 소진한 이후 각 공화국들에서 벌어진 분쟁들에 대규모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고,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소련 지도자들이 군사력 사용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어 군사적으로도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전까지 소련 정부의 검열로 공론화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던 데도브시나(소련군의 극심한 병영부조리)는 아프간 파병 소련군에서도 계속된 부조리로 인한 탈영과 자살자가 수천명 단위로 발생하고 소대, 중대 단위의 전투에서 미운 선임이 부상을 당했을 때 후임병들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려 하면서 사망률이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현상이 발견됨에 따라 아프간 전쟁을 계기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어 결국 소련 공산당의 주목을 받는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다.

 

고르바초프는 이 문제를 시정할 것을 군부에 요구하였고 전역자들을 중심으로 끔찍한 병영생활의 폭로, 병영문화의 개선 요구가 폭발하였지만 이것이 조직화된 것은 1990년의 일이었고 결국 제대로 개혁이 이뤄지기 전에 소련이 붕괴, 러시아군으로 계승되었고 경제적으로 박살난 러시아군의 병영문화는 더욱 처참하게 된다.

 

한편,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 병력은 20~ 25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도 60-200만명이 사망하고 300-500만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백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어떤 도시는 전쟁 전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전후 계산해보니 단 25천명만 살아남았으며 게다가 소련군은 전쟁 기간 동안 민가를 상대로 사린 가스 등의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하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소련의 몇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산 정권(대통령 무하마드 나지불라)만이 남았지만 희한하게도 소련군이 철수하고 난 뒤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나지불라는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으로 이어졌으나 1990년 나지불라 대통령이 정권을 겨냥한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부군의 주요 장성들을 숙군하면서 이로 인해 정부군의 군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형세가 무자헤딘 측에게 유리해졌고, 199112월에는 소련이 붕괴되어 소련 해체 이후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가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버리면서 이후 나지불라 정권은 결국 19924월 무자헤딘 반군들의 공세에 밀려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철수하는 소련군을 보며 "아프간이 괜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아닌데 멋도 모르고 쳐들어간 소련 놈들 보소."하고 배를 잡고 비웃었지만 20년 정도 후에는 정작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지면서 사돈 남 말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 항의한다는 의미로 다음 해에 열린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대부분의 서방권도 이에 동참했으며 이에 열 받은 동구권은 4년 뒤에 열린 1984 LA 올림픽에서 똑같이 갚아 줬고,이 반쪽짜리 올림픽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야 끝이 난다.

 

또한,이 시기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간 수많은 무기들은 상당수 미국이 거액(예를 들어 스팅거 한발에 10만불)을 주고 되샀지만 남은 무기들이 지금은 미군을 노리고 있다.

 

3.미국이 소련-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유도 했는가?

사실 이 전쟁의 시작은 1979년 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고의적으로 유도했는데, 당시 주 아프간 미국 대사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본국에 그런 식의 외교는 소련의 침공을 불러올테니 제발 조심해 달라고 항의성 경고를 했으나, 이미 미국 내부에서는 소련을 아프간에 끌어들여 소련판 베트남전을 하는 쪽으로 결정이 나 있었으니 먹혀들 리가 없었고 미국의 숨은 공작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CIA 국장 로버트 게이츠는 1996년에 쓴 회고록 음지로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실제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가 아닌 이미 그 6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고, 2년 후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튀르와의 인터뷰에서 게이츠의 주장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었다.

 

사실 카터 대통령이 카불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첫 명령을 승인한 것은 197973일이었고 바로 그날 그러한 지원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리라고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자료를 브레진스키가 작성했던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미래의 테러 집단들에게 무기와 군사 참모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에 대해서는 브레진스키는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이슬람교도의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라고 반문 했다.

 

우습게도 미국도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쳐들어가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였고 소련보다 2배는 되는 20년이나 전쟁을 벌였지만, 끝내 소련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게 되었다.

 

소련이 만든 아프간 정부는 그나마 3년이나 버티기라도 한데다 승자가 아프간 민심이 지지하는 무자헤딘이었지, 미국이 만든 카불 정부는 현재 붕괴직전이고 승자가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해악이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막장성을 자랑하는 종교광신 정치깡패 탈레반이기 때문에 더욱 최악의 결과를 낳았고 당연히 러시아는 이걸 보고 니들도 결국 우리와 다를 거 없었다며 조롱을 할 것이다

 

그나마 미국이 좀 나은 점이라면 소련은 이 전쟁 이후 결국 해체되었지만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세계경제를 장악한 미국 사회 특성상 어떻게든 버티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컨대,항상 내부의 통합 없이는 국가를 유지 할 수 없다는 것이 교훈이며 그 피해는 순박한 민초들의 고난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외세의 개입은 끈질긴 저항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함부로 강대국(소련,미국)이라도 정치적 목적으로 타국을 침공시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아가,아프카니스탄 정부의 붕괴와 데도브시나로 인한 소련의 붕괴처럼 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는 점을 자각하여 각종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정부(다민족 국가임)를 붕괴 시키기 위한 미국의 행보가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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