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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수많은 민족이 건국한 흥망반복> <중국굴기,중국몽...중화주의는 언제,어떻게 생겨났고 역사 속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했을까.> <과거보다 위험한 中민족주의...시진핑 중국몽>

by 찐럭키가이 202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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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수많은 민족이 건국한 흥망반복> <중국굴기,중국몽...중화주의는 언제,어떻게 생겨났고 역사 속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했을까.> <과거보다 위험한 민족주의...시진핑 중국몽>

중국 본토에서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이래 약 5000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18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200년간 부와 강이라는 단어는 중국의 금과옥조(金科玉條)였다.

1844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저술해 중국에 세계 주요 국가의 지리·역사·기후·풍속을 알린 위원(魏源)왕도(王道) 없이 부강을 실현한 바는 있어도 부강 없이 왕도를 실현한 바는 없다고 하며 그는 부()와 강()을 왕도를 이루는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돈과 권력을 가져야 비로소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이 시기를 살다간 중국 지식인과 정치가 모두 부와 강을 외쳤다.그래야만 외국으로부터 치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이때 부강이라는 단어는 결국 저항 민족주의를 합리화하는 상징이었다.

중국의 굴기(屈起)는 기존 세계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더 나아가 서양보다 더 나은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가.”중국은 G2의 한 축으로 부상하면서 관심 대상이 됐다.오늘날 중국을 구성하는 요소가 미래 세계질서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2021년 중국이 마주한 과제는 부강(富强) 이후를 상상할 수 있는지 여부다. 중국은 21세기 대전환 시대, ‘부강 이후를 상상할 수 있는가. 즉 글로벌한 질서를 제시할 수 있을까. ‘유럽적 보편주의와는 다른 중국식 보편모델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하여 다른 나라로 하여금 닮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중국은 이런 질문에 답해야만 시진핑(習近平)이 말하는 중국몽’(中國夢·중국의 꿈)이라는 것도 설득력을 갖는다.이를 위해 중국은 팬데믹 이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 단순히 전통 철학으로 되돌아갈 것이 아니라, 차별화되는 새로운 철학을 정립할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한다.그러나,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중국은 기괴한 형태의 민족주의에 함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디지털 기반 기술을 매우 빠르게 발전시키고 있긴 하다.다만 그것과 어울리는 정치·사회문화 발전을 보이진 못하며 시진핑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괴한 형태의 공격적 민족주의가 점점 심해지고 있으며 앞으로 중국을 위협할 더 큰 위기로 확대할 가능성마저 있어 우리는 중국이 인류의 미래가 될 수 있는지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됐다.

중국 역사 간략한 요약...,,주 이래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 흥망반복,중국굴기,중국몽...중화주의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역사 속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했을까.과거보다 위험한 민족주의...후진타오,장쩌민만 못한 시진핑 중국몽등을 포스팅 한다.

1.중국 역사 간략한 요약...,,주 이래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 흥망반복

한나라 때 중화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이라는 말이 성립되었다.

 

한나라의 멸망 이후 위진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에 따라 변방의 이민족들이 중국 화북 지역을 정복했고 한족들은 장강 이남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며 땅을 개척하게 된다.

 

수나라 때는 400년 간 분열됐던 중국 대륙이 재통일되었으며 이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통일왕조를 이어간다.

 

당나라가 멸망한 뒤 또다른 분열기인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송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

 

송나라는 몽골족의 왕조인 원나라에 의해 멸망해 사라지고 만다.

 

역대 고려 왕조가 918~1392,475년이고 조선 왕조가 1392~1910, 519년임에 비추어 볼 때 한족왕조가 이와 같이 지속된 적은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원나라는 한족들의 반란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났으며 명나라가 중국 대륙을 다시 차지해 통일하게 된다.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중국 대륙은 청나라에 의해 정복되고 통일된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중국 본토는 "아시아의 병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대만과 만주는 일본 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의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것처럼 현대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난징 대학살과 강간으로 유린당하며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 운동과 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보수파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군벌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 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지배당할 뻔한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중국에서는 보통 해방 전쟁이라 칭함)과 중일 전쟁(중국에서는 보통 항일전쟁이라 칭함)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

 

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웠고 그 후 중일 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 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살인과 강간, 방화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나던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101일을 국경절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국민당을 중국 대륙에서 몰아내기 위해 험준한 산을 두 발로 직접 걸으며 게릴라전을 펼친 마오쩌둥은 결국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그는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아직도 많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솔선수범하는 통치가로 기억되며 때때로 신격화되기도 한다.

 

그 후 덩샤오핑,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으로 이어지고 있고 서구 열강의 중국 쟁탈전이 벌어졌던 19세기 말, 불평등 조약의 대가로 영국과 포르투갈에 99년간 할양되었던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1997, 1999년 반환되었다.

 

2.중국굴기,중국몽...중화주의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역사 속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했을까

중국에서 중화주의 근간에는 화이론(華夷論)이 깔려 있고 화이론과 중화주의는 동일시되기도 한다.

 

자기 나라를 '중화'라 하여 존중하는 반면 주변의 다른 부족을 '이적(夷狄)'이라 하여 천시한 사상으로, 중화 사상이라고도 한다.

 

''는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문화 민족임을 뜻하며, ''는 문화 수준이 낮은 주변의 여러 민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인의 민족적 자존을 나타낸 사상이다.

 

중국 고대 사회, 춘추오패 시대가 지나고 전국칠웅 시대에 이르자 기존 도덕은 붕괴하고 약육강식 논리가 자리 잡았고 주나라를 따르던 제후들은 제가끔 왕을 칭하며 중원 지배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춘추 시대 이민족의 침입이 심해 그들을 한()민족 공동의 적으로 삼고, 중화의 문물, 제도를 지키기 위하여 양이(洋夷)를 부르짖었다.

 

화이질서라는 관념은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화이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에 형성됐다.

 

가령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변방 이적(夷狄) 취급을 받으면서도 '()'를 자처했다(1990년대 출토된 죽간 기록).

 

중국에선 중화주의보다 화하주의(華夏主義)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하는 곧 화()와 통하며 이미 고대부터 중화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개념이다.

 

화이질서는 진나라, ()나라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로 확대됐고 한무제 시대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국가 통치와 역사의 정통성이 천()에서 비롯된다는 중화적 정치신화를 만들었고 중화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완성된 것이다.

 

이성규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중국과 천하라는 공간 범위는 물론, 그 주체 민족이라는 화하(華夏)의 실체도 유동적일 수 있다.

 

·(·) 이후 화이(華夷) 관계의 대표적 형식은 조공체제다. 다만 당시 조공체제는 일방적 강압의 결과라기보다 쌍방 합의 관계라고 봐야 한다.

 

()가 오히려 조공체제에 편입되기를 원한 경우도 적잖다.

 

아울러 당대에는 한유가 이단 배척 사상과 결합하였다.

 

송나라 때에 금나라와 대립하면서 중국의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중화 의식이 높아졌고,

금나라 때문에 남쪽으로 쫓겨간 남송 때의 주희는 자신의 사상 체계에 화이 사상을 철저하게 반영하였다.

 

청나라 초기처럼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할 때 중화주의가 첨예화하기도 했다.

 

문제는 중화주의가 점차 중국 문명의 우월성과 주변 이적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형태로 중국인 뇌리에 박힌 것으로 이민족은 중국을 위협하는 동시에 중화주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존재로서 타자화됐다.

 

근대에 이르러 청일전쟁(894618954) 패배와 조선, 타이완의 이탈이 결정적 계기로 조공·책봉체제를 근간으로 삼은 중화제국은 해체됐다.

 

중화질서를 떠받치던 이념체계 천()의 초월성도 무너졌고 천하적 세계질서 균열로 중화제국은 과거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지만,지도자와 지식인은 중화주의를 뿌리 깊게 내재화했다.

 

근대 중국의 아버지라고 할 쑨원(孫文)조차 그랬다.

 

그는 실제 역사에서 해당 국가들이 중국의 직접통치를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티베트, 몽골, 타이, 버마, 부탄, 네팔 등 주변 국가를 두고 "언젠가 중국의 지배로 돌아와야 한다"고 봤다.

 

쑨원은 "우리 4억 인은 매우 평화로운 민족일 뿐 아니라 문명적 민족이다. 중화제국 전통이 지켜져 (명나라 때) 동남아시아 소국들이 조공했으며, 중국에 귀화하고자 했다. 그들이 중국 문화를 흠모해 귀화를 원한 것이다.중국이 무력으로 그들을 압박하지 않았다."라고 하며 중화주의 시각을 위와 같이 드러낸 바 있다.

3.과거보다 위험한 민족주의...후진타오,장쩌민만 못한 시진핑 중국몽

현대 중국 지배이념인 사회주의와 중화주의의 관계를 볼 때 근대 중국이 반()식민지로 열강 침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 동력은 공산사회를 향한 열망보다 중화제국 자존심 회복이다.

 

이른바 '민족해방형 사회주의'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전통 중화주의는 근대적 민족주의와 결합해 강고한 중화민족주의로 거듭났고 따라서,중국 공산주의 기저에는 중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거자오광(葛兆光) 푸단대 역사학과 석좌교수는 "1920년대부터 중국 정치인과 지식인은 서양 민족국가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 '대일통(大一統)' 이념의 영향도 깊이 받았다"고 봤다. 또 근대 중국 정치인과 지식인이 두 가지 책무에 시달렸다고 지적했다. 각각 전통적 천하질서를 근대적 국가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 변강(邊疆)을 중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과제다.

 

량치차오(梁啓超) 같은 지식인은 천하보다 국가 형성을 근대 중국의 급선무로 봤지만 대다수 엘리트는 중화제국 강역을 포기하지 못했다. '구주(九州: 하나라 우임금이 중국 영역을 9개 주로 나눔) 천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탓에 천하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역대 중국왕조 정통성을 담보한 대일통은 근대에도 영토 보존 의식으로 이어졌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중국 침략은 중화주의를 더 자극했다.

 

중화제국체제 붕괴 속에서 중화주의가 생존하는 데 일본 침략이 본의 아니게 '기여'한 것이다. 일본 침략의 역설이다.

 

21세기 중화주의는 '중국모델' '중국몽'과 함께 거론되며 오늘날 중국 지식인의 태도도 중화주의 연장선에 있다.

중국몽

추이즈위안(崔之元) 칭화대 교수 등 중국 신좌파 지식인은 "중국이 서양 중심의 일원적 역사관을 타파하고 미래 세계문명을 창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유가(新儒家)로 불리는 천윈(陳贇) 화동사범대 교수는 "유가문명은 보편주의적 문명이며, 중국 굴기는 유가문명이 기독교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애매한 좌파'를 자처하는 류칭(劉擎) 화동사범대 정치학과 교수는 "중국 신좌파, 신유가의 탈서양 중심주의에는 새로운 중국 중심주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치인과 지식인은 서양 자본주의 폐단인 독점·착취를 날카롭게 비판하나 정작 오늘날 중국 사회는 그러한 자본주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심화돼 중화주의가 서양문명의 대안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내세운 중국몽은 오히려 그 그림자를 가리기 위한 화려한 선언에 불과한 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 중국의 이성적인 저항적 민족주의와는 달리 시진핑 정부가 보여주는 민족주의는 감성적이며 특히 젊은 층이 매우 적극적으로 따르며 새로운 감성적 민족주의가 차세대 정치지도자의 가치가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젊은 세대도 중화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최근 일부 '애국주의' 성향 청년들이 김치, 한복 등 한국 문화를 자기 나라 것이라고 우겨 논란이 일었고 때 아닌 문화 기원 논쟁 이면에도 중화주의가 있다.

 

모든 문화가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극단적 자기중심주의 형태로 특히 밀레니얼 세대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볼 때 중화주의는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이뤄지지 못하는 사회는 자기검열이 일상으로 자리 잡아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디지털 사회도 앎과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면 구성원의 새로운 창의성이 말살된다. 기술 발전으로 연구 혁신이 이뤄져도 자유로운 정치·사회문화로 수렴되지 못하면 한계는 분명하며 더욱 새로운 시대를 이끌 AI(인공지능) 철학, 혹은 과학과 결합된 인문학의 등장을 기대할 수 없다.

 

폴 코언(Paul A. Cohen)은 중국에 대한 내재적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조차 이제 중국이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새로운 변화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코언은 중국이 의외로 변화무쌍했으며 역동적 문명을 가졌다고 본다.

 

중국에도 코언 같은 문제의식으로 홍콩중문대 선전 캠퍼스의 정융녠(鄭永年) 교수는 중국 정부에 부단히 조언한 학자다.

 

그는 중국 정부가 2021년부터 시행할 14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조언하기 위해서 지난해 8월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시진핑 주석이 소집한 전문가 좌담회에 참석했다.

 

좌담회에서 정 교수는 미·중 무역전쟁을 기술냉전인 동시에 중국·서양 간 정치경제학 모델 간 충돌로 규정했다. 미국이 중국을 또 하나의 소련으로 만들어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성적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중국이 자만해선 안 되며 과학·이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래 중국을 위해 내놓은 대책으로서 중산층 육성과 소프트 인프라 확충,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이 뼈대며 전체 인구의 70%를 중산층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립·가공에 머물 것이 아니라 ‘made in China’ 핵심 기술과 소프트 파워를 개발해야 한다고도 봤다. 특히 그는 과거 명나라가 빠진 함정을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15세기 명나라가 정화(鄭和)의 원정으로 원양 항해에 성공했으나 보수 이데올로기에 빠져 서양과 같은 대항해시대를 열지 못한 점을 상기시킨 것이다.

 

2008년 중국이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12년 경제적으로 일본을 제치기 전까진 사상계의 활력은 공산당과 지식사회 사이 힘의 비대칭 속에서도 그나마 중국 사회가 살아 있다는 지표였고 중국 사상계는 매우 고무됐었다.

 

그러나,2012년 시진핑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 사상계의 활력은 급속히 사라졌고 최근 중국에선 ()정부는 후(·후진타오)정부만 못하고 후정부는 장(·장쩌민 )정부만 못하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합리적·전통적·카리스마적 지배 등 3가지 형태를 말했고 현재 중국은 합리적 지배보다 전통적·카리스마적 지배에 의존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이나 덩샤오핑(鄧少平)은 카리스마에 의존해 중국을 지배했고 시진핑에겐 그들만큼의 카리스마가 없으며 중국 정부가 시진핑 사상고안을 당교(중국 공산당 학교)의 긴급 과제로 설정한 이유다.

 

사상이란 작위적으로 금방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마오의 카리스마는 대장정(大長征)을 끝내고 옌안(延安) 시기 고난의 오디세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덩은 마오와 함께 혁명시기의 온갖 고난을 겪었기에 덩도 마찬가지다.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박해를 견디고 ‘4인방을 처단했고 이후 개혁·개방을 추진해 현재 중국의 기틀을 닦았다.덩의 카리스마는 이런 역정 끝에 형성됐다.

 

두 인물은 신중국을 개창하고 신중국을 잘살게 한 상징이다. 마오는 사회주의로 중국을 구했고, 덩은 자본주의로 중국을 구했다고 평가받으며 미국이 금융위기에 빠져 있던 2008,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시진핑 시기의 과제는 중국에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중국인을 행복하게 잘살게 하면 된다. 중국인이 행복해야 한다. ‘논어선정을 베풀면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구절이 있다. 나라 안을 쇄신하면 밖까지 끌어들일 힘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시진핑이 집권한 중국에서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차이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합의를 위한 토론은 형식에 불과하며 시진핑이 주창한 신시대(新時代)’, 중국은 하드 파워 굴기에 박차를 가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소프트 파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는 중국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중국과 역사·문화·지리적으로 인접한 한국은 더욱 그렇다.

 

대중 정서에서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게 중국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이른바 중국 디커플링현상이 상당해 대학에선 중국학을 전공하거나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 수가 격감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느 사이버대에선 중국학과가 존폐 위기까지 맞았다.

 

100년 전 중국은 매력적이고 각성한 청년도 넘쳐났고 이들이 진짜 신중국(新中國)’을 만들었다.

 

쑨원(孫文), 루쉰(魯迅),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같은 진정한 지성인이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정통'만 허용하고 '이단'을 금기하는 풍조에서 비롯됐고 이처럼 타자를 포용하지 못하는 폐쇄적 태도는 비극을 초래한다.

 

한 가지 이데올로기만 옳다는 확신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려 했으나 결과는 현실 속 지옥이었다.

 

자기 인식을 제대로 못 하면 타자에 대한 인식도 온전할 수 없으므로 중화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을 철저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자기 인식이 안 되면 타자 인식도 정확히 이뤄질 수 없으므로 중국이 세계와 제대로 소통하고 교류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민족 중화제국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은 중화주의를 온존케 하는 동력이나 중화제국과 중화주의는 중국인이 스스로를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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