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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인 나라...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의 시대적 배경,발단,전개 과정> <마오의 2인자 린뱌오 몰락> <4인방의 등장과 몰락> <덩샤오핑...중국에 부는 개방의 바람>

by 찐럭키가이 202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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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인 나라...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의 시대적 배경,발단,전개 과정> <마오의 2인자 린뱌오 몰락> <4인방의 등장과 몰락> <덩샤오핑...중국에 부는 개방의 바람>

중국 공산군(홍군(紅軍))1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장정(1934~1935)4년간의 국민정부군과 내전을 승리하고 1949,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하며 중화 인민 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였다.그러나 대약진 운동이라는 경제 정책을 실패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본격적으로는 1965년 말부터 1968년 말까지, 그 여파를 감안하면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 이 사건은 마오쩌둥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자본주의의 길을 가려하는 수정주의자인 주자파(走資派)들을 전면적으로 숙청하자고 하는 데서 출발했다.문예 비판에서 시작하여, 정치 권력 투쟁으로 발전하였으며, 여기에 학생·노동자들이 홍위병을 조직하면서 전반적인 대중운동으로 급성장했다.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당내의 후계자였던 실용주의 노선의 류샤오치(劉少奇)를 숙청하고, 새로운 후계자로 린뱌오를 지명하고, 아내 쟝칭(江青)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4인방'을 새로운 정치 후계자 그룹으로 등장시켰다.따라서 노선의 측면에서 문화대혁명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당내에 존재하던 좌익과 실용주의 노선 간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결과는 좌익 노선의 완벽한 승리였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 내부의 노선 투쟁이 중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모든 분야와 지역에서 대립과 갈등이 심화·확대되었다.이 시기는 무한적인 반대와 투쟁이 용인되었고, 마오쩌둥을 제외한 모든 기존 권위에 대한 반대와 투쟁이 허용되었다.그 결과 전사회적으로 피해가 상당했다. 경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쌓아온 경제적 성과를 이 기간에 까먹었다.또 정상적인 교육기관이 약 10년 동안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20만 명의 교수, 교사, 연구원 등이 박해를 받았다.간부의 측면에서 지방당 고위 간부 중 약 70~80%, 중앙당 간부 중에서 약 60~70%가 이 기간 중에 숙청되었고, 전체적으로 약 300만 명의 당정 간부들이 숙청되었다가 1970년대 말에 복권되었다.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약칭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괴 운동이다.자국의 문화를 자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멸절시킨 전례 없는 대사건으로,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킬링필드와 함께 공산주의를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인 나라...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의 시대적 배경,문화대혁명의 발단,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마오의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4인방의 등장과 몰락,덩샤오핑...중국에 부는 개방의 바람등을 포스팅 하겠다.

1.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인 나라...대약진 운동

1949,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하며 중화 인민 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고, 여러 계급과 민족이 힘을 모아 새로운 사회를 이룩할 것이다.”새롭게 탄생한 중화 인민 공화국은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지주 제도를 없애고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또한 썩을 대로 썩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문제점을 제거해 갔으며, 개인의 재산을 없애고 산업 발전을 국가 정책으로 실천해 그 결과 농촌의 사정이 전쟁 전보다 나아지자, 이번에는 ‘15개년 계획을 통해 공업국으로 나아가기 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예상 외로 목표 달성은 순조로왔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 승리 이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었고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농촌 민주주의자 소리를 들으며 부패한 장제스 독재 정권의 완벽한 대체제로 인식되던 공산당은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오히려 장제스 정권보다도 더한 독재와 부패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1958년 타이완(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중화 민국)이 중국에 대포를 쏜 일이 일어났고 중국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하고 중국이 부탁한 핵개발 기술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이때 중국과 소련은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싸우고 있었고 또한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화해를 추진하고 있던 터라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렸으며 이후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개발에 나서게 되었고 1964년에는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흔히 공산화 이후 1949~1957년까지는 대약진 이전의 평화기로 인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시기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상층 구조의 창출, 토지 개혁, 집산화, 전매제 실행 등의 무리한 정책의 시행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으며 이전에 없던 종교와 외국인, 자본가들에 대한 난폭한 공격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토지 개혁 과정에서 70~20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집산화, 전매제에 저항하는 여러 봉기 진압과 종교에 대한 탄압 등을 계산해보면 공산화 초기에만 최대 400만 이상이 정권에 희생되었다.

 

더욱이 아직까지 구시대의 관습에 젖어있던 공산당 간부들이 지역의 집단농장에서 마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사례들도 보고되어 마오쩌둥이 이들에 대한 숙청을 지시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공산정권의 모습에 실망하여 전국 각지에 반발이 빗발쳤고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이 실시한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에서는 전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에 국영언론들까지 거의 비난에 가까운 어조를 쏟아내며 '장제스가 나았다!' 고 외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이 시기의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이나 노동쟁의는 국민당 시절의 가장 거센 반정부 시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경악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즉각 반우운동을 진행하여 대숙청을 감행해 당과 국가 내 반대파들을 완전히 숙청하면서 싹쓸이를 해버렸다.

 

여기서 마오가 모든 직장과 기관에 10~20%의 우파가 숨어있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는 통에, 의무적으로 모든 기관이 직원의 10% 가량을 해고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대약진 운동이었고 대약진 운동의 결과가 너무나 참담해서 마오쩌둥이 사퇴를 하는 등 중국 내부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나타난 통계 조작, 장부 조작 등에 대해서 관료들이 국민당 시절의 개버릇 못 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민당 시절 공무원들의 경우, 5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인 숙청당해 공산당 출신 하부조직들로 대체된 상황이었고 지도자 비위 맞추기 위한 통계조작같은 것은 모든 독재국가에서 관리가 없으면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공산당이라고 부패가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현실을 경시한 공산주의의 이론적 문제도 있었지만 오랜 내전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이 지나치게 조직화가 되었고, 민주집중제보다 한술 더 뜬 주석제 하의 공산당으로 초권력적(超權力的)인 집단이 되어 주석의 주장에 아무도 감히 반발할 수 없는 초권위주의적 정당으로 변한 것이 가장 컸다.

 

모든 것은 상명하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민중이 주인이라던 공산당의 이상은 점점 훼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워낙에 낙후된 농업국가이고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감시시스템이 없던 만큼 광적인 혁명열기와 사적인 이익을 탐하는 공산당원들의 부정축재 행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이후에 나타난 모습을 '다섯 가지 풍조의 만연'이라 하는데 공산주의 풍조, 허위과장 풍조, 강제 명령 풍조, 생산의 눈먼 지휘 풍조, 간부 생활의 특수화 풍조가 그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마오쩌둥주의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들, 급진적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다시 복원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류사오치는 안정화 대신에 대약진 운동의 결정적 책임을 '계급의 적'들에게 몰아서 수백만명의 당원을 숙청하고 수만명의 당원을 처형하고 현 사태에 반발하는 젊은 학생들을 마오쩌둥의 반우운동을 롤모델삼아 우파 기회주의자로 몰아서 마구 탄압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첫번째 홍위병이 되어 마오쩌둥의 지원 사격 하에 죽창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돌리게 된다.

 

1960년대 소련의 경제적인 도움이 끊기자, 중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게다가 급속한 공업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자는 목표 아래 1958년부터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여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2천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사망한 것은 마오쩌둥의 방향이 어긋났음을 말해 주었고 이미 중국은 내부에서 기아와 숙청, 내부정화 활동, 보수파의 약진, 노선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당기면 걷잡을 수 없이 펑하고 터질 상황이었다.

 

한편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경제가 점차적으로 정상화되던 시기에 라디오 생산단가가 급속히 하락하여 라디오의 생산량이 급속히 올라가게 되었고, 중국에서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결합하여 라디오가 문화대혁명을 위한 선전도구로 널리 활용되었고, 중국사회와 문화에 그야말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문화대혁명의 시대적 배경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으며 혁명은 공산당 권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수천만명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이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하였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3~5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 인민들이 아사하고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파멸적인 결과가 초래되자 이를 주도한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1959년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당//군의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국가 주석을 사퇴하고 중국 공산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함만을 유지하며 사실상 2선으로 후퇴하면서 국정에서 배제된 것이다.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노선대립이 생겨났고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대중노선을 주장하였으나,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 등의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각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시 할 것을 주장하였다.

 

무너진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 (劉少奇,유소기)와 덩샤오핑 (鄧小平,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류사오치가 국가 주석직을 승계해서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정책을 펼쳐서 중국 인민들의 호평을 듣게 되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가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마오쩌둥은 국부로서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하려고 하지는 못했고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신과 같은 수준의 권위를 얻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마오쩌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했으나 문제는 마오쩌둥 본인이 대약진 운동이라는 엄청난 대 삽질을 저질렀기 때문에 다시 정치 일선에 전면으로 나설 수 있을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1959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밀어붙인 삼면홍기(三面紅旗)에 대해서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 공사는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해 여기에 불을 붙인 게 펑더화이였다.

 

물론 펑더화이의 이 발언은 나름대로 마오쩌둥을 생각해서 한 충언이었으나, 초조해져 있던 마오쩌둥에게 이 소리는 굉장히 귀에 거슬리고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펑더화이의 비판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한 통의 개인 편지였다

 

단순히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우 상세한 설명과 예시를 들어가면서 칭찬과 부족한 점을 차분한 어조로 그 예로 "전 인민들의 철강생산 중에 수많은 흙으로 만든 용광로를 만들어 많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였다. 이는 당연히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지질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를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관계 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간부들도 이 운동 기간 중 단련을 하였다는 점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평가가 있다.

 

하지만 수신인인 마오가 최고 권력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사실 칭찬은 한 톨도 없는 게 맞긴 했다.전국의 지질조사나 전문가 경험치 획득 등은 그냥 있는 사실만 쓰자니 잘못했다는 말밖에 없어서 듣기 좋게 집어넣은 빈말일 뿐이고, 마오가 그걸 못 알아들을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어쨌든 마오는 이 편지를 읽고는 펑더화이에게 "감히 나한테 주석 자리를 사임하라고 강요하다니!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야!"라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었고, 펑은 잔뜩 쫄아 깨갱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펑더화이는 실각하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인 린뱌오를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부장에 앉혔다.

 

게다가 삼면홍기(三面紅旗)에 긍정적이었던 류사오치조차도 고향 후난성을 시찰한 후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를 보고 경악하여 7천인 대회를 소집하여 마오의 주장인 공91의 평가를 정면으로 뒤집고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며 마오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분노한 마오는 류사오치의 말을 막으면서 실패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고 반박했지만, 류사오치는 오히려 성공이 일부 지역에 국한될 뿐이라고 맞서고 마오를 개인적으로 만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격렬하게 맞섰고 논쟁을 하며 싸웠다.

 

둘은 곧 진정하고 화해하기는 했지만 마오는 류사오치가 자신이 죽은 후에 중국에서 수정주의를 이끌 중국의 니키타 흐루쇼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오는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물러났고, 류사오치가 주석에 올라 덩샤오핑과 함께 정돈사업이라 불리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며 강제적인 집단화 추진 정책이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일부 후퇴시키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라는 말을 남기며, 실용적인 경제정책으로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대체하려 했다.

 

사실 마오쩌둥도 공동식사를 비롯하여 자신이 제시한 과격한 집산화 정책이 터무니없고 오히려 악효과만 많은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 스탈린처럼 위상이 격하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눈에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부활시키려는 '주자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류사오치는 자신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중국을 영도할 새로운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자신이 실세가 되려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은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이나 반우파 투쟁을 벤치마킹하여 공포정책을 반대파를 숙청함으로 당내에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류사오치의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류사오치는 <공작조>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로 사회주의 정권과 체제에 의심과 회의를 보이는 민중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집중적으로 타격당한 인물들은 바로 베이징의 대학생들이었고 특히 칭화대학의 학생 콰이다푸는 공개적으로 류사오치를 비판했다가 류사오치에게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서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류사오치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만과 분노가 퍼졌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노리고 학생들에게 접근, 콰이다푸 등 학생들을 영웅으로 내세우며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여기에 장칭과 천보다, 린뱌오 등 당내 좌경세력이 마오쩌둥을 결사옹위하며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부으며 류사오치 세력을 회치기 위한 준비가 착착 갖춰졌다.

 

나아가,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1962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고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다.

3.문화대혁명의 발단

1965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였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은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베이징[北京]시 부시장 우한[吳唅]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였다.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

그런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해서파관이라는 한편의 연극이 거대한 화약고에 불을 당기고 만다.

 

1959년 당시 베이징 부시장이었던 우한(吳晗)은 역사학자로서의 지식으로 연극 해서파관을 발표하는데,이 연극은 명나라를 배경으로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폭군 황제인 가정제에게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우한은, 문화대혁명 때 감옥에 갇혔다가 1969, 옥사했다.

 

그럭저럭 잘만든 연극이고, 연극을 발표하기 전부터 마오쩌둥은 해서를 높이 평가하며,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처음 연극이 발표되었을 때, 마오는 "이거 괜찮네."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애초에 이 연극을 제작하도록 의뢰한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 본인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야오원위안이 1965, '문회보'라는 신문에 "이거 우리 마오님 까는 것" 이라는 칼럼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칭에 의하면,해서는 펑더화이를 의미하며, 황제는 마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1959, 루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빗대서 쓴 연극이라고 주장했다.이것이 바로 해서파관 사건이다.

 

이것이 자신을 겨냥한다는 것을 직감한 베이징 시장 펑전은 이것을 (현실사회와는 무관한) 학자들 사이의 학술토론으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파장을 축소하려 했지만 이미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 장칭, 야오원위안 등이 수많은 선전매체를 동원해서 맹공격을 퍼부었고, 아예 마오까지 직접 이 키배에 뛰어들어서, 1966516,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통해 펑전을 비판했다.

 

여기에 린뱌오가 "우리 마오님은 천재! 마오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아요!" 식의 일장연설을 했고, 727,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자!" 라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고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한다.

 

조반유리는 말 그대로,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홍위병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국 펑전은 덩퉈, 랴오모사 등과 함께 숙청당했다.

 

"천하무적의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에 가득하다-조반유리"

 

마오는 젊은이들이 잘한다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88,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라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실권파의 권력기반이었던 베이징시 당위원회와 삼가촌(三家村)그룹은 마오쩌둥 추종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19664월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이 해임되고, 8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1966자본주의적 사상·문화·습관을 몰아내자.”며 벌어진 문화 대혁명에 동원된 사람들은 대학생과 중·고등 학생이 중심이 된 홍위병이었다.

 

4.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지만,그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자유롭게 기존의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고 마지막 목줄까지 풀린 홍위병들은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을 일으켜 대학살의 서막을 알렸다.

홍위병들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고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마구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해 절, 사당,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과 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고 개인의 인권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고,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한다.

 

19668월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백만인 집회가 열렸고, 이곳에 모인 홍위병(紅衛兵)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다.

 

홍위병은 전국을 돌며 모든 낡은 것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고 각종 문화재와 예술품이 파괴되었고 반혁명 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은 홍위병이 개최한 대회에 끌려나와 자아 비판을 해야 했지.

 

많은 관리와 지식인, 학자가 비판과 모욕을 당하고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학대 끝에 목숨을 잃었으며, 자살을 한 사람도 많았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문화 대혁명은 이름과는 다르게 산업, 과학 기술, 교육에 큰 피해를 주었다.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고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문화 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결과적으로는 중국이란 넓고 오래된 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일어난 이 사건의 이름은 문화대혁명이지만 실상은 문화대숙청이다.

 

중국사에서는 분서갱유, 문자의 옥 등의 반달리즘(문화유산이나 예술, 공공시설, 자연경관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을 훨씬 능가하며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은 적어도 자국의 문화산업까지 파탄 내진 않았으나 이때 일어난 파괴의 수준은 분서갱유 같은 전승국에 의한 패전국의 "문명 파괴"였다고 보면 된다.

 

중국이 고전 문화 산업에선 아직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문화대혁명 때문에 이마저도 유교 서적을 대만이나 한국에서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이고 당연히 현대 대중 문화 면에서는 엄청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사실 이 문화대혁명식 반달리즘의 진수는 문화재 파괴보다도 문화 예술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린치에 있는데 변에 문화 예술 쪽으로 종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쳐들어가서 "게으름뱅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들겨 팬 뒤, "현실 체험"이라면서 집단 농장에 감금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제각기 대중 문화를 발달시켜가던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대중 문화는 그런 단계를 전혀 밟을 수가 없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뒤덮었던 시기에는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들 수 있겠고, 시진핑도 당의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 시중쉰이 순식간에 몰락했고 시진핑 자신도 량자허촌으로 하방되어 토굴집에서 살고 갖은 일을 맡아 하면서 힘든 생활을 견뎌내야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중국의 경제성장도 1967년과 1968년도에 마이너스 5.7%, 4.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류사오치 시절의 경제회복의 성과를 까먹었으며 1969년과 1970년에는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농어촌 개발이 진행되어 16%, 1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성장이 2.3%까지 내려앉는 등 침체되는 등 냉온탕을 오갔다.

 

결국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따라잡았고 북한도 고도경제성장을 하던 시기에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후진 개도국으로 남게 되었다.

 

1960년 세계경제력 순위에서 중국은 세계 5위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6위를 기록했는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이후로는 서독과 이탈리아, 브라질 등에게 따라잡혀서 1976년에는 10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1981년에 13위를 기록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그것도 그나마 인구증가율이 높아서 유지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는다. 그리고는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둔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고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로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그가 런던 대학교에서 일했었단 이유로 반동으로 몰린 후 공묘로 끌려가서 베이징 제8중학교에서 몰려나온 여중생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굴욕적인 사진이 찍히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직책을 가지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고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말살당했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은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하여,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

 

그리고 영국, 인도 등 일부 국가의 외교 공관들도 '반제국주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사관을 불태우고 직원들을 끌고 다니며 두들겨 패고 서방 대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 대사관도 수정주의자 소굴이라고 포위를 당했고 인도네시아나 케냐, 몽골 대사관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홍위병의 이러한 외교공관 공격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컸던 것이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었는데 홍콩의 67폭동을 홍콩 당국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홍위병들이 흥분하여 영국 대표부를 점령, 대표부 직원들을 억류하여 폭행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訪中)한 북한의 오진우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소위 조반(造反)을 시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개 10~20대의 학생들이었고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들이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개념을 찾고 새 시대를 준비하다가,개혁개방이 시행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간간이 반성을 하거나, 사과 글을 내는 홍위병들도 있긴 하다.

 

홍위병 대다수는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졌다.

 

사실 홍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홍위병 중 초기 보수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후기의 조반파(造反派)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이 자산가와 지식인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인 셈으로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앞당겼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긴 하나 홍위병들의 준동으로 만들어진 사회는 모두가 못 살고 모두가 못 배운 퇴보한 평등라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무슨 고대, 중세 시대에 농경민족 침략해서 교회나 절을 불태우면서 좋아하는 타민족 야만인들도 아니고, 자기들 문화재와 지식인, 전통문화를 다 부수고, 향촌 공동체나 사회는 물론 심하면 자기들 가족도 말아먹고는 그때가 자기들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 회상한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심각하다.

 

또 권위타파와 만인평등이라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중국이 이 "모두가 평등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엘리트 계층을 재건하는 데 진땀을 뺐고 그 결과 현대 중국이 다시 "불평등"해졌으며,현재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지속되는 중국에서 과연 권위주의가 타파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평등"도 허울뿐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거기에다가 개혁개방 이후로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다른 의미로 도덕관념을 상실했다는 의견도 있을 지경이다.

 

중국에서 부정적 의미로든 긍정적 의미로든 봉건적 잔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완전히 뿌리뽑혀 중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예절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유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 공안 수장 셰푸즈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발언할 정도였고 공안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으며 사실,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었다는 말도 있다.

 

마오쩌둥은 이런 사태를 보고받고도,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라고 지껄였다.

 

16개조에선 "무력 쓰지 말고 좋게 말로 하자", 정확하게 말하면, "투쟁수단은 무투(武鬪)보다는 문투(文鬪)가 좋다" 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지키는 홍위병 따위 없었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이른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였고 이후 그는 1973,저우언라이가 복귀시켜 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822,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 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될 정도였고 9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다.

 

1010일에는 린뱌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즈음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지며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며, 이들은 홍오류라 하여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홍위병 사이에 만연하던 혈통주의에 대해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발표하면서 핍박받던 흑오류, 회오류 출신 홍위병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을 조반파라고 한다.

 

이들은 "무투(武鬪)보다 문투(文鬪)를 하라!" 라는 모토 하에 하방(下放)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들을 조반파(造反波)라고 한다.

조반파

조반파였던 사람들은 홍위병들의 패악질은 보수파들이 한 짓이고, 자신들은 그런 일에 별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고 반대로 보수파들은 나쁜 짓은 조반파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출신 배경의 차이라던가 여러 복잡한 사회, 정치적 문제가 얽히긴 했지만 악행으로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린뱌오와 장칭은 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 홍위병과 언론 등을 통해 상하이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맹비난한 뒤 숙청했다.

 

사실상 상하이 지방정부의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이를 1월의 폭풍이라고 한다.

 

베이징에선 4인방과 박자가 잘 맞은 캉성이 모두가 굶을바에야 자본주의를 하자고 주장한 부총리 타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고 이제 공산당 내에서는,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해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다.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리싼 역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장칭은 문혁(文革)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하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다.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지만 펑더화이와 허룽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펑더화이는 비투회에 불려다니는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암으로 사망했고 허룽은 19661230일 장칭이 칭화대학에서 허룽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청하자 겁에 질려 저우언라이에게 중난하이에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사정했으나 저우언라이는 거절했다.

 

결국 허룽은 홍위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했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단식 하다가 196969일 사망했다.그는 "나는 단지 마오쩌둥 주석이 한마디 말만 해주기를 바라오.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 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주더의 경우,그나마 피해를 덜 봤지만 홍위병들로부터 군부 내에서 기어다니는 군벌 찌끄러기라는 욕을 듣고 있었으며 녜룽전, 쉬샹첸, 예젠잉, 천이는 2월 역류에서 문혁파에게 저항했다가 마오쩌둥이 장칭, 캉성, 천보다를 지지하는 통에 박살이 나서 쉬샹첸과 천이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고 천이는 공장 노동자로 하방조치당했다.

 

마오쩌둥은 3월 흑풍을 허용하면서 군부대가 홍위병을 진압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2월 역류로 인민해방군 지도부 자체가 무력화되었으며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으로 불어닥친 탈권 현상으로 인해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고 홍위병들이 군구 지도부 전체를 조리돌리며 군구 부사령관 급의 고급 장교들을 끌어내서 중태에 빠질 정도로 구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난징군구 총사령관 쉬스유는 백주대낮에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해군총사령관 샤오징광도 납치당해 톈진으로 압송되어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니 이때의 혼란상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각 지방의 군구들이 홍위병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서 군구 사령관도, 총정치위원도 없는 곳이 많았다.

 

중국의 안보와 전시상황에 존립을 책임지는 인민해방군이 겨우 동네 학생 꼬맹이들 모아서 조직한 홍위병에게 털렸다는건 이때 얼마나 나라의 기본틀이 무시당했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애초에 출신에 따라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있었고 원래부터 통일된 조직의 지휘를 받는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조직인지라 한 지방이나 학교에도 여러 홍위병 분파가 존재했고 홍위병의 각 병단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키배라고 쓰고 온갖 병림픽을 벌였으며 급기야 중화기로 무장하고 서로 전쟁을 치렀고 참다 못한 인민해방군이 출동해서 홍위병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기도 했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 류사오치는 시골에 내려가 일개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씹었고 결국 그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방치되다가 사망했다.

 

더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마오의 권력까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다.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 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다.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하방(下放) 활동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 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였다.

 

마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좋다고 농촌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70년대 후반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다시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쨌든 이들이 도시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면서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만들며 대만이 중국의 경제력을 따라잡게 공헌한것과는 다르게 농촌에서 일하면서 문맹퇴치나 농업생산 증대에는 큰 역할을 담당한것은 맞기 때문에 농촌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긍정적 효과가 있기는 했다.

 

5.마오의 2인자가 된 린뱌오의 몰락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사라진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文革)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특히,1962,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동네북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에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나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순으로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자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해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린뱌오는 강경한 저항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충돌했고 소련이 핵공격까지 시사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은 소련을 막기 위해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등 원수들도 대부분 동의했지만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만으로 충분히 소련과 미국을 동시에 막을 수 있다면서 수정주의자를 막기 위해 제국주의자와 손잡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정신 나간 대국 쇼비니스트라고 면박주면서 그를 데탕트 문제에서 배제하고 저우언라이, 예젠잉 등을 앞세워 헨리 키신저와 접촉했다.

 

위신에 타격을 입은 린뱌오는 천보다와 손을 잡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려 했고 1970823, 려산에서 열린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전체회의에서, 천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징징되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는데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고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제거하기로 결정하는데 린뱌오의 아들인 린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모는 197198일부터 910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기차로 순시 중이었는데, 일설에는 마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마오를 암살할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마오가 일정을 바꿔 암살을 피했다고도 하며 어쨌든 이 시점에 음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어떤 시도였든 간에 결국 실패했다.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린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고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으며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도 불분명한데, 중국군이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설과, 연료부족 혹은 기기불량으로 추락했다는 설이 분분하나 2016년 해금된 몽골 기밀문서에 따르면 조종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6.4인방의 등장과 몰락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고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왕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고 1972,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 나아갔다.

 

그런데 1973,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는데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하며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관장해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그리고 왕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안티임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하며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비림(批林)은 린뱌오[林彪] 안티, 비공(批孔)은 공자 안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 안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들은 4인방의 안티 운동에 질렸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고 이들은 목표를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12, 덩샤오핑에게 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다.

 

197618,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으로 사망했고 그는 대중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번질까 우려했고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으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다. 45일이 청명절(중국의 4대명절 중 하나로 이날은 묘지를 살피로 간다 함)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더 나아가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고 4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 집회가 1차 천안문 사태이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고 결국 46,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가택 연금되었으며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7699,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고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혹은 당신이 맡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편하오)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죽음에 임박한 마오쩌둥에게 뒤를 보장받은 총리 화궈펑(華國鋒, 1921~ )은 원로 예젠잉(葉劍英), 녜룽전(聶榮臻) 등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이끌던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이 작전은 마오의 부장인 군사령관 왕둥싱(汪東興)이 주도해 1064인방을 체포했고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7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종결이 선포됐다.

 

마오의 자리는 화궈펑이 차지했지만 마오의 복제품 같았던 화궈펑은 험난한 정치 투쟁을 이기기에 부족했다.

 

7.덩샤오핑...중국에 부는 개방의 바람

잠룡(潛龍) 덩샤오핑이 광둥성의 원로인 쉬스유(許世友)의 도움으로 부주석, 정치국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복직했다.

 

▲1977년 7월 복직된 덩샤오핑은 5년에 걸쳐 화궈펑과 경쟁하며 화궈펑은 여전히 마오쩌둥의 방식을 고집한 반면 덩샤오핑은 해외를 순방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등 세련된 기법으로 정치에 나섰고 덩샤오핑은 실권을 장악한 후 경제정책을 최우선으로 했으며 1979년 4월 중앙위원회 업무회의에부터 현 중국 발전의 초석이 된 경제특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고 시행했다.

 

그해 7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제 형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동시에 4개 현대화가 주로 거론됐는데, 여기에서 천윈(陳雲, 1905~1995)은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등 개방의 호흡조절을 역설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좋은 고양이다.’라고 말하며 빛깔이야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제일이라는 뜻으로 이를 흑묘백묘론이라고 하는데 1980년대 중국식 시장 경제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적절히 합치기를 원했고 경제 정책은 자본주의식으로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 정책으로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으며 중국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중국의 개혁과 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809월 덩샤오핑의 오른팔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이 화궈펑을 대신해 총리에 임명되면서 덩샤오핑은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덩은 이후 다양한 외부 환경 속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 만들기에 치중해 다행히 1982년과 198362, 52억 달러의 무역흑자가 났다.

 

하지만 1985년은 이전의 폐쇄사회와 그간 진행된 개방 사이의 문제가 급속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조너선 스펜스는 당시에 '농업생산, 1가구 1자녀 정책, 공업 인센티브제와 경제특구, 지적 표현, 대미-대소 관계, 당 조직과 군대의 정리와 재편, 인민저항의 합법성' 등이 초미의 관심사이자 불화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봤다.

 

이런 불안 속에서도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해 갔고 막후의 실세인 덩샤오핑은 198711월 말 리펑(李鵬)을 임시 총리로, 당과 군대에 영향력을 가진 양상쿤(楊尙昆)을 국가주석으로 밀었지만 1988년 경제상황은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고 농민들은 환금작물의 재배를 위해 곡식생산이 줄어 배급제에 문제가 나기도 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인사가 만사인 게 정치인데,리펑의 무능력이었다.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로 톈안먼에 관한 상세한 책을 쓴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 핵심에는 리펑에 관한 농담을 소개하는데, 그 농담 속에서 리펑은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로 그를 소개할 만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은 198964일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자 5·4운동 7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인 이 해는 그간의 개방의 속도와 갖가지 갈등이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89415일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변화를 바라는 층에서는 이 흐름을 호기로 생각했고 특히 후야오방은 1986년과 1987년 학생시위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 때문에 1987년에는 해임됐고, 해임과정에는 자기비판서까지 제출했으니 그에 대한 동정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976년 저우언라이가 죽었을 때, 톈안먼 시위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낸 덩샤오핑이 권좌에 있는 만큼 한 번 목소리를 내볼 심사였다.

 

22일 장례식날 광장의 진입을 통제했지만 광장에 군중은 늘어나기 시작했고, 517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것으로 추산됐다.

 

언론 역시 서서히 호의를 갖기 시작했고 좀 더 강한 개방주의자인 자오쯔양은 519일 광장에 가서 단식 농성하는 이들을 눈물을 흘릴 듯한 모습으로 말렸지만 다음날 리펑과 양상쿤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톈안먼의 진압을 추인했고, 그 전면에 장쩌민이 섰으며 63일 밤늦게 군은 광장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군의 진압으로 사망한 숫자는 정부 발표가 319(군인 포함)이고, 당시의 외국 언론의 보도로는 2,000~3,000명가량이며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솔즈베리나 가미무라 고지 등은 현장에서 벌어진 잔악성을 그들의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1976년 톈안먼에 빚진 덩샤오핑이 내린 결정 가운데 최악이었는데 더욱이 530일을 전후로 대학생들이 광장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등 열기가 식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624일 중국 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자오쯔양이 범한 잘못에 관한 보고를 채택하는 동시에 장쩌민을 총서기로 정식 선출했다.

 

톈안먼에서 물러나야 할 첫 번째 대상으로 불린 리펑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 덩샤오핑은 어리석지 않았고 대신에 상하이 당서기였지만 중앙 정치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쩌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장쩌민은 혼자 올라오지는 않았고 그의 오른팔인 쩡칭홍(曾慶紅)을 비롯해 그와 함께 성장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동행했으며 중앙정치에는 곧바로 상하이방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톈안먼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거센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누구나 덩샤오핑이 지도자라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갔다.

 

198994일 덩은 당 정치국에 사표를 써서 보냈다. 당시의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원로들도 사표를 받는 데 동의했고 1990년을 맞이하는 춘지에(설날)는 상하이를 방문해 푸둥 개발을 역설하는 주룽지를 만났으며 이 길에서 덩샤오핑은 장쩌민과 어울리지 않는 리펑이라는 짝 대신에 주룽지로 바꿀 생각을 갖게 됐다.

 

덩샤오핑은 여전히 건재했고 1992119일 오전 9시 광둥성 선전(深圳)에 덩샤오핑을 태운 기차가 도착했는데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시작이었다.

 

주하이(珠海)를 거쳐 상하이에서 막을 내린 이 길에서 덩샤오핑은 지속적인 개방을 확실시 했으나 험난한 정치투쟁에서 세 번이나 살아난 덩샤오핑은 죽음 앞에서는 일어설 수 없어1996219일 밤 9시 파킨슨병에 의한 호흡순환기능부전으로 사망했다.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에도 중국경제는 급성장했고 장쩌민은 신속히 당과 군을 장악해 일인자로 군림해 장쩌민 시대에는 매년 10퍼센트씩 경제가 성장했다.

 

엄청난 속도였고 급속한 경제의 팽창은 다른 사안들을 잠재우기에 충분했지만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커갔고, 중국 국부의 70~80퍼센트를 공산당의 자제가 갖고 있다는 평들이 이어졌다.

 

200211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모두가 일정한 수준의 부를 누리는 샤오캉(小康) 사회가 주창 되었는데 이는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한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해 준다.

 

2003년 장쩌민, 리펑, 주룽지 등 3세대 정치인들은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끝으로 공식석상에서 물러났고 후진타오, 쩡칭홍, 원자바오 등이 부상했다.

 

장쩌민 중심의 3세대들은 뒤로 물러서는 듯이 보였으나 이들은 연령적으로 봤을 때, 당시 70세 전후고 더러는 1949년 해방 이전에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해 대외적인 명문도 높은 편이었고 또 덩샤오핑 이후 중국 부흥을 이끌었던 실무진이었다는 점에서 원로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15차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일하다가 동반 퇴진한 장쩌민과 리펑, 주룽지, 리루이환(李瑞環), 웨이젠싱(尉健行), 리란칭(李嵐淸) 등이 선두에 섰고 이들은 각기 자신의 전문 분야가 있지만 이들은 동반자적 원로로 활동하기보다는 여전히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장쩌민의 주도하에 움직이는 원로세력으로 작용했다.

 

건강을 잃은 덩샤오핑은 원로들과 힘을 합쳐서 자오쯔양을 밀어내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결정했고 그때까지의 특징은 원로들이 있긴 했지만,덩샤오핑이나 장쩌민 모두 후진타오에 비해 강력한 카리스마로 권력을 잡아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장쩌민은 2007년 전인대가 있기 1년 전부터 베이징에 머물면서 주변을 다지기 시작했고, 자신이 예봉을 꺾었던 원로정치의 부활을 시도하며 전인대 시작일인 15인민일보사설을 보면 이런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사상인 '삼개대표' 이론은 사설 서두에 들어간 반면, 후진타오의 조화(和諧) 사상은 두 번째 맥락의 후반에 해방사상, 개혁개방의 유지, 과학발전의 추진, 조화사회의 촉진을 통한 샤오캉(小康) 사회 신승리,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신 국민을 통한 분투에야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 22일 최종 결정되는 새로운 상무위원단의 구성은 그런 변화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됐고 결국 인선과정에서 자신의 인물을 채우려는 후진타오 현 주석과 여전히 입김을 되살리려는 장쩌민 전 주석 등 전임자들 간의 힘 대결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장쩌민의 막후역할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상무위원진으로 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장춘, 스진핑, 리커지앙, 허궈지앙, 저우용캉 등이 뽑혔고 상하이방 3(우방궈, 자칭린, 리창춘)과 태자당 2(시진핑, 허궈창), 친 쩡칭홍계 저우용캉을 합치면 9명 가운데 6명이 장쩌민 중심에서 나왔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며 또한 차기 후진타오를 이을 후계 주자가 상하이방의 후계자인 시진핑이란 점도 앞날을 예측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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