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전쟁> <전쟁의 발단이 된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 침공...그러나 미국은 벌집을 잘못 건드렸다.> <안정화 작전으로 전환과 철군>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전쟁은 2001년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 테러 사건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시작되었으며 21세기 최초의 전쟁이며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은 아프가니스탄 침략군이 실패한 전쟁이기도 하고,미국이 이 무의미한 전쟁에 최소 2조 달러를 지출함으로써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가 약화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전쟁에 대해서 전쟁의 발단이 된 9.11 테러,아프가니스탄 침공...그러나 미국은 벌집을 잘못 건드렸다.안정화 작전으로 전환과 철군등을 포스팅 한다.
1.전쟁의 발단이 된 9.11 테러
❶9.11 테러라는 자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대형 참사에 대해 분노한 미국이 테러의 배후를 찾아내어 박살내고자 한다는 것은 테러 당일부터 이미 명백한 일이었다.
❷통념과 달리 9.11 테러 이전의 미국 역사를 통틀어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 본토에는 자잘한 피해만 입혔을 뿐이었기에 미국인들의 사고에는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 본토는 총알 한 발 안 떨어질 만큼 안전하다"는 믿음이 자리 잡혀 있었는데 이런 믿음을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 바로 9.11 테러였다.
❸테러 단체의 공격으로 미국 본토 내에서도 가히 미국의 심장부라고 할 만한 뉴욕, 그 중에서도 중심부인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두 건물이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수도 워싱턴 D.C.의 국방부 건물마저 공격당하며 3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전 미국인들의 꼭지가 돌아버리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므로 여론은 일제히 복수를 외쳤고, 정치권도 주전론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❹평소 깐죽거리며 미국 심기를 거스르는데 일가견이 있는 북한을 비롯한 반미국가들마저도 이 시기 만큼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며 바짝 엎드리고 유감을 표하기에 바빴고 이란의 신정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테러는 나쁜 짓이지만 그렇다고 복수는 옳지 않다"고 표명한 정도가 그나마 유화적인 입장이었으며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이슬람권 국가의 대중은 "또 미국이 테러를 핑계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 하는구나!" 라고 반미 시위를 했지만 젊은 학생들이나 떠들었지 정부는 미국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번질까 봐 벌벌 떨었으며 국제적으로도 분노했기에 미국의 강경한 주전론을 막을 나라는 실질적으로 아무도 없었다.
❺한편 그 당시 미국과의 대표적 라이벌인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기 재임시절이어서 전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의 실정에 의한 혼란을 수습하고 복구하느라 내부적으로 바빠서 국제정세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옛 소련 시절의 경험에 의해 굳이 막지 않았다.
❻얼마 뒤 이 테러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거느리는 알 카에다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자 미국은 복수전을 계획하였고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집권 세력인 탈레반에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이미 테러 당일 엔터프라이즈급 항공모함 전단이 집에 가던 귀국길을 유턴하여 인도양에 전개를 마쳤고, 뒤이어 수많은 해군 전력이 가세해 엄청난 전력을 인근에 집결시켰다.
❼미국이 직접적으로 침공해올 루트가 없다는 점과 자신들의 후견국인 파키스탄을 믿은 탈레반은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변을 인도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거절하면서도 오사마 빈 라덴에게는 강제 추방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것을 권고했으나 이 시점에 탈레반은 이미 미국의 분노를 사기엔 충분했다.
❽그렇더라도 알 카에다는 탈레반 산하 단체가 아니므로 미국이 이 전쟁을 할 정당한 명분이 생기는 건 아니나 미국은 아프간 반군 세력인 북부동맹에 엄청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고, 파키스탄에게는 "길을 내주지 않으면 석기시대로 만들어버리겠다."며 협박 단박에 영공 사용권을 얻어냈다.
❾그리고 뒤이어 아프간 북쪽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미국에 자국 영토 및 기지 사용 권한을 주고 또한 아프간 서쪽의 시아파국가로서 수니파세력인 탈레반과 앙숙인 이란마저도 탈레반을 비난하고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졸지에 포위된 상황에 놓였다.
❿미국은 즉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정했고 탈레반 정권이 미군의 공습에 붕괴될 것은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새 지도부를 모색하는 한편 이들을 지원해 줄 국제안보지원군(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ISAF) 창설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요구하였다.
2.아프가니스탄 침공...그러나 미국은 벌집을 잘못 건드렸다.
❶미군은 해군 5함대(엔터프라이즈 항모단, 칼빈슨 항모단, 키티호크 항모단, 루즈벨트 항모단.)의 함재기 250대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디에고 가르시아에 배치한 제9공군 산하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가했고 육군 총병력은 미군 5천명에 27개국의 다국적군 조금으로 매우 적었다.
❷초창기 침공과정은 전적으로 특수부대 위주로 육군 그린베레 제5특전단을 주력으로 하여 이를 지원하기 위해 160특수작전항공연대, 528특수작전지원대대, 112특수작전통신대대, 4심리전단, 96민사작전대대가 편성되었고 약간의 네이비 씰과 데브그루, 델타 포스, 그리고 제75레인저연대 3대대가 투입되었다.
❸2001년 10월 7일 공중폭격으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2002년 1월말 까지 약 1만8천 소티의 공중폭격을 실시했으며, 탈레반 전사 8천~12,000명을 사살하고 7천명의 포로를 획득하였고 이 기간 동안 민간인의 피해는 1천명 가량이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16명을 포함하여 39명이 희생되었다.
❹9.11 테러가 일어난지 15일 만인 9월 26일, 7명으로 구성된 CIA 특수작전단(SAD) '조브레이커' 팀이 최초로 아프간 국경을 넘었고 이들의 임무는 아프간 내 반탈레반 세력인 북부동맹과 접촉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고, 탈레반 지도부와 주요 군사거점의 위치를 파악하여 곧 다가올 대대적 침공의 밑바탕을 그리는 것이었다.
❺곧이어 그린베레 5특전단 소속의 두 개의 ODA 팀이 합류했고 이들은 북부동맹의 도움과 정밀항공지원에 힘입어 아프간 주요 도시들을 상당수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소수의 특수부대가 지역 반군 세력과 연합하여 한 국가를 거의 전복시켜버린 이 대활약은 세계 특수전사에 길이 남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중 하나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놓치고 만다.
❻미국의 공식적인 군사 개입은 10월 7일, 수도 카불을 비롯한 주요 군사거점 및 대도시들이 대규모 총공습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단 하루만에, 아프간의 방공망과 통신망, 공군세력은 소멸되었고 동시에 북부동맹도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고 미 항공세력이 북부동맹에 대한 대규모 근접항공지원에 나서며 탈레반 지상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❼이 시기까지 미군은 산악 지대에서 탈레반의 게릴라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아프간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고 북부동맹을 지원하여 특수전부대 위주로만 작전을 벌였고 결국 개전 한달여만인 11월 13일, 수도 카불이 북부동맹에게 함락되었다.
❽한편 미국정보부는 북부동맹의 군사행동과는 별개로 미군사령부의 직접적인 지시대로 행동하고 지상작전에 큰 지원을 해줄 아프간인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반탈레반과 왕정복고를 외치다가 파키스탄으로 망명을 떠났고 영어에 능통한 하미드 카르자이라는 사람을 찾아내어 카르자이는 미국의 지원을받아 파키스탄에서 아프간 남부국경으로 몰래 입성하여 반탈레반 세력들을 규합하고 소규모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이후 미군의 훈련을 받은 카르자이의 특수부대는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12월 7일 탈레반의 중심지 칸다하르를 함락시킨다.
❾중심지를 빼앗긴 알 카에다와 탈레반 패잔병들이 국경도시인 토라 보라(Tora Bora)에서 재정비를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군은 12월 12일부터 5일에 걸친 혈전 끝에 도시를 점령하나 오사마 빈 라덴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❿그래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이 시점에 이르러 사실상 탈레반 정권은 끝이 났고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⓫아프간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본 회의에서 12월 22일 새 임시정부의 수립이 결의되고, 탈레반 본거지 칸다하르를 함락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적이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지명되었고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했고 10월 7일에 시작된 전쟁은 불과 2개월 7일만에 끝났다.
⓬사실 2001~02년 즈음부터 미국은 이라크전을 할 생각에 아프간전에서의 마무리와 탈레반 소탕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되며 덕분에 탈레반의 주력들은 미군과 북부동맹군을 기만하며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서 다수가 도주하여 전력을 보존하며 포위되어 있던 빈 라덴조차도 미군의 지상군 포위망이 없어서 도주가 가능했다.
⓭중부군 사령부에서는 10산악사단의 증원배치를 요구했었으나 거절 당하고 게다가 IAI(아프간 재건 임시정부)와 탈레반을 몰아내는데 역할을 한 군벌인 북부동맹이 지원금 배분 문제를 두고 다투는 바람에 아프간 정규군과 경찰의 교육과 배치가 늦어졌으며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스스로 1년이 넘도록 개판 5분 전인 아프간의 상황을 방치했고, 되지도 않는 이라크전을 준비하느라 중부군 사령부만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⓮게다가 항공폭격의 초기성과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최소한의 투입으로 정밀타격을 통해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요하던 럼즈펠드 체제 속에서 미군의 항공폭격과 정밀타격의 한계는 이미 드러나고 있었고 당장 탈레반 주력들을 포위하고도 제대로 된 항공폭격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바람에 적이 도주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그런데도 이라크전을 준비하느라 문민통제를 미국 역사상 최악으로 남용할 정도로 정신 나가 있던 게 럼즈펠드 체제의 부시 행정부였다.
⓯한편 일방적 침략이었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달리 이 전쟁은 해방의 성격이 짙었으나 대다수의 농촌 아프간인들은 국가보다는 부족에 더욱 큰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에 중앙정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도시에서와 달리 향촌지역에서는 탈레반 이전부터 이슬람 원리주의가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레반의 막가파 정책도 조금 더 불편해졌을 뿐,탈레반의 몰락이나 미국의 진주는 자신들과 별 상관 없는 중앙정부가 바뀐 것에 불과해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⓰반면 농촌지역과는 달리 도시민들인 카불 시민들은 왕정과 공산정부 시절에 상당한 수준으로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탈레반의 정책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을 야기했던 것이므로 탈레반이 쫓겨나자 즉각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북부동맹군을 환영하였고 남자들은 탈레반의 강요로 길렀던 수염을 밀어버렸으며 여자들은 부르카를 벗어던지고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했으며 금지되었던 각종 음악과 춤이 등장했고, 탈레반에 당해왔던 시민들이 탈레반 병사들의 주검을 길거리로 끌고 와서 모욕을 가하는 것이 우리나라 뉴스에 여과 없이 방송되기도 했으며 탈레반의 축출을 기뻐했다.
3.안정화 작전으로 전환과 철군
❶2002년 1월에는 빈라덴 색출을 위해 카불이 점령된 이후에는 지상군 투입을 늘려 기존의 합동특수작전TF 산하 북부/남부 합동특수작전TF 외에 TF-Rakkasan(101공수사단 3여단), TF-Commando(10산악사단 2여단), TF-58(미해병 15원정대), TF-64(호주군 SAS 특공대)등이 생긴다. 그리고 이를 통합지휘 하기 위해 제10산악사단이 주축이 되어 TF-mountain이 만들어진다.
❷한편 다국적군도 속속 들어와 전년도인 12월 22일에는 영국군 300명이 들어 왔고, 2002년 2월 27일에는 한국군 의료지원단 동의부대 1진이 파병된다.
❸3월 1일부터 18일까지 '아나콘다 작전'이라는 대규모 작전을 실시하여 동부의 신카이 산맥의 아프간군을 소탕하게 되며 여기까지 진행되니 더 이상 아프칸에는 탈레반 세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되자 합동특수작전TF가 개편되어 안정화 작전에 힘쓰게 된다.
❹2월~3월경에는 미 중부사령부 산하 연합지상구성군사령부(미제3야전군) 산하 10산악사단(TF-Mountain)이 중심이 되어 작전을 책임져 아나콘다 작전 당시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800~1500명의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전사했다.
❺2차대전이래 미국이 침공받았다는 9.11 테러 문제에 아프간전은 명분이라도 확실해서 병력동원이 대규모라도 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이 뚜렷이라도 했지만 부시행정부와 럼스펠드는 대책 없을 정도로 무분별한 민영화 집착에 의한 소수 병력 운용 정책 고집과 이라크전을 일으키면서 이 명분을 날려먹었고 덕분에 5만명내에 있던 아프간 주둔 미군을 15만명까지 증원시키던 오바마 행정부에게 있어서 병력동원에 대한 정치적 부담까지 크게 지우게 된다.
❻오바마 행정부때 아프간 파병증원에 대한 병력문제 증원은 여론적 반대에도 시달렸을뿐만 아니라 럼스펄드의 아웃소싱화에 병력감축이 지속된 휴유증 문제는 여전한 상태였고 실제로 진주만 사태와 같이 미국이 침공 혹은 공격받은 아프간전 문제인데도 그렇게 얘기가 나오던 징병제 문제를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꺼내지도 못하고 기존 병력에서 어떻게든 증원한 수준이 16만명선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부시행정부의 럼스펠드 체제에서의 대책 없는 군축&민영화와 이라크전 삽질에 의한 돈 낭비와 병력소모 및 국력 소모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선 장병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심각해지고 있으며 별의별 인간들이 병력 부족으로 군에 들어오게 되면서 전쟁 범죄도 늘어나고 있고 또한 전쟁터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장병들이 본토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들이 늘고 있었다.
❽2011년 7월 7일 캐나다군이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철군하였고 2021년 6월 부로 독일, 이탈리아도 완전히 철수했다.
❾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을 때, 명분 있게 철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오바마도 기회를 놓쳐버렸고 결과적으로 공화당을 공격할 좋은 구실이 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공화당-민주당 모두 마땅한 출구전략이 없어 아프가니스탄 전쟁 책임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가 결국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식적으로 철군을 완전 결정하게 됐다.
❿물론 바이든 역시 10년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한 것을 명분으로 아프간에 계속 미군을 주둔시켜야 할 이유가 이미 사라졌다고 주장할 뿐 이 끝없는 수렁과도 같았던 전쟁의 책임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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